성녀의 유골성녀의 유골 - 10점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북하우스
  나에게 있어 캐드펠 시리즈는 각별하다. 나는 이 작품을 2003년에 처음 접했는데, 그 전까지는 역사추리라는 장르가 있는줄도 알지 못했다. 역사소설도 좋아하고 추리소설도 좋아하지만 그 두가지를 합한 팩션(fact+fiction)이라니! 그야말로 내가 원하던 장르였던것이다. 나는 캐드펠에게 반해 20권이라는 다소 많은 이 시리즈를 금세 다 읽어버렸고 이후로도 역사추리소설이라면 관심을 갖고 접하게 되었다.

  요즘들어 '다빈치 코드'같이 역사적 미스테리를 후대에 파헤치게 된다는 내용의 작품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런 작품에 '역사추리'라는 수식어를 붙이는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국내에 '역사추리'라는 장르가 보편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역사추리'라고 소개되는 작품중에 진정한 역사추리가 몇개 없는것을 보면 자칫잘못하다간 진짜 역사추리소설이 설자리가 사라지게 되는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정의하는 '역사추리'라는 장르는 실제 존재했던 역사적 상황안에서, 실존했던 인물과 허구적 인물이 공존하며, 어떠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즉 다시말하면 현대의 인물이, 과거의 사건을 해결하는건 역사추리가 아니다. 그건 차라리 스릴러나, 탐험소설이라고 불리는게 더 적합할 것이다. 말이 조금 길어졌는데, 자세한내용은 내가 예전에 작성했던 포스팅을 참고하였으면 좋겠다. 이러한 역사추리물중에도 단연 완성도있게 돋보이는 작품이 바로 이 캐드펠 시리즈다.

  엘리스 피터스가 1977년부터 20여년에 걸쳐 총 20권을 펴낸 캐드펠 시리즈는 12세기 영국, 시로프셔 주의 시루즈베리라는 마을을 중심으로 수도사 캐드펠이 혼란스러웠던 중세에 일어나는 사건사고를 해결해나가는 이야기다. 주인공 캐드펠은 실존 인물로 ,수도사임에도 불구하고 편협하지 않은 종교관과 따뜻한 인간애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60대의 노인이지만 수도원 생활을 시작한 지는 20년이 채 안되는 캐드펠은 과거 십자군원정을 갔다왔을정도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때를 바탕으로 한 민첩한 몸놀림과 냉철한 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믿음, 약초에 대한 뛰어난 지식 등은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다. 작가의 손에서 재탄생하여 중세적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정도로 유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캐드펠. 신성과 세속과 같은 종교적 문제 뿐만아니라 잉글랜드와 웨일즈, 스티븐왕과 모드 황후라는 지역적,정치적 문제에서까지 캐드펠은 현명하고도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엘리스 피터스가 완벽한 중세 인물을 재현하는데 실패했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그가 더 돋보이는것이 아닐까. 그리고 과연 중세인들중에 그와같은 인물이 없었다고 그 누가 잘라 말할 수 있겠는가.
  
  한편 캐드펠 시리즈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것은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마을인 잉글랜스 시로프셔 주의 시루즈베리에대한 묘사다. 마을과 여러 건축물들, 전원적이고 아름다운 풍경등의 묘사는 너무나 실감나도록 당시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독자는 시루즈베리 수도원과 시루즈베리 시내, 산과 강과 들판을 캐드펠과 함께 지나다니며 시루즈베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시루즈베리는 캐드펠때문에 관광명소가 되었다)

  성녀의 유골은 그러한 캐드펠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이다. 주인공인 캐드펠이 첫 등장하는것이니만큼 작가는 캐드펠이 어떤 인물이라는것을 보여주는데 많은 힘을 쏟고 있다. 캐드펠이 몸담고 있는 성 베네딕트 회 시루즈베리 수도원은, 야심만만한 부수도원장 로버트가 수도원과 자신의 지위를 강화시키기 위해 성녀의 유골을 모셔오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웨일즈에 있는 위니프레드 성녀의 유골을 찾아 가지만 웨일즈인들은 성녀는 자신들의 것이라며 반발한다. 그 와중에 마을의 지주가 살해당하고, 로버트는 성녀의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간단한것같지만, 사실 이 이야기의 플롯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교회내 권력에 대한 집착, 기적과 계시, 잉글랜드인과 웨일즈인간의 차이 및 갈등, 지주와 자유민과 농노, 사랑과 질투 등등이 포함되며 이야기는 한층 더 복잡함을 띤다.

  캐드펠시리즈는 완벽하게 재현해 낸 중세시대 영국과 영국인들, 그리고 그 와중에 벌어지는 각종 사건 사고와의 얼개, 그러나 그것을 해결하는데 있어 시공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사랑과 믿음, 인간애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만들어진 하나의 걸작이다. 역사추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 세계'에 푹 빠지는것이 상당히 익숙할 수 있으나 아직 그것이 어색하다면 차근차근 역사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으로 접근해 보길 권한다. 또한 사건을 해결할 때 현대의 수사방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생각해가면서 읽는다면 더 큰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것이다. 지문도 DNA도 추출할 수 없는 과거에 과거인들이 어떤 지혜를 가지고 사건을 해결하는지, 또 그만큼 인간에 대한 신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게 된다면 '역사 추리소설'의 매력을 찾아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인공 캐드펠이 각권마다 새로이 보여주는 또다른 매력역시 찾아내길 바라며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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